<우원식 / 국회의장(지난달 25일)> "네, 이 안건에 대해서 무제한 토론이 있는데"
<우원식 / 국회의장(지난달 3일)> "무제한 토론을 실시함에 따라…"
<우원식 / 국회의장(지난 1일)> "따라서 무제한 토론 중에는…"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 달 사이 '무제한 토론'이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울려 퍼졌습니다.
영어로는 필리버스터, '해적'이라는 뜻의 네덜란드어가 어원이라고 하는데요,
15~17세기 '대항해시대', 유럽 국가들이 다른 나라 상선을 노략질하도록 공인해준 무장 선박, 즉 '합법적인 해적'을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됐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 국회에선 주로 소수당이 다수당 주도의 의사 진행을 '합법적으로 방해'하기 위해 나서는 무제한 토론을 의미합니다.
필리버스터는 당초 다수당의 독주 등에 소수당이 저항할 수 있는 수단, 견제 장치로 여겨졌습니다.
우리 헌정사 최초 필리버스터 기록은 1964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회 연설로 기록돼 있는데, '한일협정 관련 여당의 비리'를 폭로한 동료 의원의 체포동의안을 무산시키며, 본래 취지를 잘 살린 국회 역사의 '명장면'으로 꼽힙니다.
<故 김대중 전 대통령(2007년)> "김준연 의원 구속동의안이 들어왔는데 당신이 필리버스터를 해서 자정까지 끌어야 한다… 밤 10시인가 돼가니 결국 정부가 포기하더라고요"
1964년 첫 필리버스터 이후, 두 번째 필리버스터는 50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2016년, 19대 국회 때였는데요.
민주당 등 야당은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해 필리버스터에 나섰고, 38명의 의원이 9일 동안 이어가 '세계 최장' 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19대 국회 야당의 필리버스터를 포함해, 21대 국회까지 이뤄진 필리버스터는 국회 역사 60년간 총 9차례였습니다.
60년간 9건, 필리버스터가 정치권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여겨져 왔고, 그만큼 드문 사례였다는 걸 보여주는 수치인데요.
때문에, 필리버스터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면 일약 '스타 의원' 반열에 오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윤희숙 / 국민의힘 전 의원(2020년 12월)> "'닥쳐 3법'처럼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을 너무나 가볍게 수행하고, 행정부도 아니죠, 청와대에서 데드라인을 설정…"
하지만 22대 국회 들어서는 필리버스터가 '일상'이 돼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수치로 살펴보면 더욱 명확해지는데요,
앞서 60년간 9차례였던 게, 22대 국회에선 해병대원 특검법과 방송4법, '25만 원 지원법' 등에 대해 60여일 만에 벌써 세 차례나 이뤄졌습니다.
우리 국회에선 전체 의석 300석 중 5분의 3인 180명이 찬성하면 필리버스터를 24시간 뒤 종결할 수 있는데, 190여석을 확보하고 있는 '거대 야당'이 '토론 종결권'을 매번 행사하고, 소수당인 여당은 또다시 필리버스터에 나서는 '소모전'이 반복되는 형국입니다.
때문에, '법안처리 무력화'보다는 '도돌이표 정쟁', 소모전에 그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의석이 텅텅 빈 상황에서 이뤄지는 '무관중 필리버스터'는 일상이 됐고, '명연설'이나 '스타 의원'은 나오지 않고 고성과 설전이 울려 퍼지기 일쑤입니다.
<우원식 / 국회의장(지난 1일)> "토론을 하고 있으니까요, 이야기를 다 들으시죠. 좀 조용히 하시고요"
종전 국민의힘 윤희숙 전 의원의 '최장 시간' 기록을, 같은 당 초선 김용태 의원 13시간 12분에 이어 박수민 의원이 15시간 50분을 발언하며 잇따라 갈아치우는가 하면,
<김용태 / 국민의힘 의원(지난 29일)> "민주당의 방송장악에 대한 음모를 (말씀드리기 위해) 그 필리버스터를 오랫동안 하는 의지를 보여드리는 것이 국민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습니다"
욕설·노래를 하거나 눈물을 보이는 장면도 포착됐습니다.
<박선원 / 민주당 의원> "이런 정말 XX들이! 뭐 하는 거야 이 자들이! 이처럼 열심히 국회의원들이 일할 줄이야,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하면 안되겠죠"
<박수민 / 국민의힘 의원(지난 1일)> "아빠는 25만원 상품권을 반대했지만 가장 빛나는 모습으로 너희들의 미래를 책임진다"
'법안처리 무력화'보다는 '도돌이표 정쟁', 소모전에 그치고 있는 '필리버스터 정국'에 의원들 사이에서도 "국민 피로감이 높은 만큼, 대안을 제시하고 토론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조진만 / 덕성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소수자들이 자신의 의견의 정당성이라든지 아니면 여론전이라든지 아니면 타협이나 조정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야 되는데 사실은 그렇게 기능하고 있지는 않은 부분들이 있는 거죠"
여소야대 국면, 안타깝게도 22대 국회에선 앞으로도 '필리버스터 정국'이 이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여야 모두 '법안 강행 처리와 필리버스터·거부권 행사'가 반복되는 소모전을 멈추고, 전략적 접근과 정치 복원에 나서는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해 봅니다.
지금까지 여의도 풍향계였습니다.
PD 임혜정
AD 최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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